편파적이 아님 —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2024)

편파적이 아님

(impartiality)

편견이 없거나 편애하지 않는 것. 공평함. 편파적이 아닌 것은 지위, 말솜씨, 부, 뇌물 등으로 인해 영향을 받거나 그 반대로 가난하거나 그 밖의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 대한 감상에 빠져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판단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이른다. 편파적이 아닌 상태라면 모든 사람은 각 사람이 받아 마땅하고 필요로 하는 것에 따라, 공평하고 공정한 것과 조화되게 대우를 받게 된다.—잠 3:27.

‘편파적으로 대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표현 나사 파님은 문자적으로 “얼굴을 들어 올리다”를 의미한다. (레 19:15) 오리엔트식 인사법 가운데 하나는 겸손하게 몸을 굽혀 얼굴을 땅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었다. 인사를 받는 사람은 답례의 표시로 그리고 상대방을 인정한다는 표시로서, 몸을 굽힌 사람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창 32:20 비교. 이 구절에 나오는 ‘친절하게 맞아 주다’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얼굴을 들어 올리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표현을 번역한 것이다.) 이 표현은 부정하게 특혜를 베푸는 것을 가리킬 때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히브리어 표현 나카르 파님(‘편파적이 되다’로 번역되어 있지만 문자적 의미는 “얼굴을 알아보다”임)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 1:17; 16:19) 그리스어 표현 람바노 프로소폰(‘편파성을 보이다.’ 문자적 의미는 “얼굴을 받다, 혹은 받아들이다”)은 전술한 히브리어 표현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누 20:21, Int 비교) 이 두 단어가 복합된 형태들은 “편파성, 편애”(로 2:11; 야 2:1), ‘편애하다’(야 2:9), “편파적”(행 10:34) 등으로 번역된다.—Int 비교.

여호와는 편파적이 아니시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아무도 편파적으로 대하지 않고 뇌물을 받지도 않으[신다]”고 알려 주신다. (신 10:17; 대둘 19:7) 사도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그를 보내어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좋은 소식을 선포하게 하셨을 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은 편파적이 아니시고, 도리어 모든 나라에서 그분을 두려워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행 10:34, 35; 로 2:10, 11.

창조주이자 지극히 높으신 분인 여호와의 결정과 행동을 문제시해서는 안 된다. 그분은 자신이 창조하신 것과 관련하여 원하시는 대로 하실 수 있으며 아무에게도 빚지신 것이 없다. (로 9:20-24; 11:33-36; 욥 40:2) 그분은 개인이나 집단은 물론이고 나라들까지도 자신의 목적과 자신의 지정된 때에 따라서 다루신다. (행 17:26, 31) 그렇지만 하느님은 편파적인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은 사람의 외모나 소유물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의 사람됨과 행한 일에 따라서 각 사람에게 갚아 주신다. (삼첫 16:7; 시 62:12; 잠 24:12)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편파적이 아닌 행로를 동일하게 따르신다.—마 16:27.

이스라엘에게 치우친 편파성을 보인 것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고대 백성으로 사용하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편파적인 행동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분이 이스라엘을 대하신 일을 정직하게 조사해 보면 그러한 비난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신 것은, 그들이 위대하고 수가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그들의 조상이자 자신의 벗인 아브라함의 믿음과 충성에 대해 사랑과 인식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야 2:23) 또한 그분은 자신의 이름을 그들 위에 두셨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오래 참으셨다. (신 7:7-11; 겔 36:22; 신 29:13; 시 105:8-10) 이스라엘은 순종하는 동안에는, 율법이 없는 나라들보다 월등한 축복을 받았다. 이스라엘이 불순종했을 때, 하느님은 참을성과 자비가 많은 분이시면서도 그들을 처벌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은혜를 받은 입장에 있었지만 하느님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율법 아래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한층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었다. 율법에는 율법을 어기는 자에 대한 저주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율법의 말씀을 행함으로 실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 27:26) 유대인들은 율법을 어기는 바람에 이 저주 아래 들게 되었는데, 이 저주는 죄 많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받은 유죄 판결에 부가된 것이었다. (로 5:12) 그러므로 유대인들을 이 특별한 무능력 상태로부터 구속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죽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기둥에서 죽어야 하셨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3:10-13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다.

따라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치우친 편파성을 보이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모든 나라를 축복하실 것을 염두에 두고 이스라엘을 사용하셨다. (갈 3:14) 하느님은 이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예정된 때에 사실상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해 일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 점과 일치하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유대인만의 하느님이십니까? 그분은 또한 이방 사람들의 하느님이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이방 사람들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이 한 분이시라면 그러합니다. 그분은 할례받은 사람들을 믿음의 결과로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도 그들의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로 3:29, 30) 게다가 고대의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다른 나라들에서 온 사람들도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를 숭배하고 그분의 율법을 지킬 경우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 아래 들어올 수 있었다. 예로서 기브온 사람들, 느디님(“주어진 자들”이라는 의미), 그리고 많은 외국인 거주자들을 들 수 있다.—수 9:3, 27; 왕첫 8:41-43; 라 8:20; 민 9:14.

여호와께서는 참을성과 자비가 많으신 분이기에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반복적으로 그들을 다시 받아 주셨지만, 결국은 여호와의 이름을 지닌 백성인 그들을 버리셨다. (누 13:35; 로 11:20-22)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러한 상황에 적용된다. “그분은 각자에게 그 행한 일에 따라 갚으실 것입니다. ··· 진노와 분노, 환난과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해로운 일을 행하는 모든 사람의 영혼에 있을 것인데, 먼저 유대인에게, 또한 그리스인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영광과 영예와 평화가 있을 것인데, 먼저 유대인에게, 또한 그리스인에게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에게는 편파성이 없기 때문입니다.”—로 2:6-11.

따라서 하느님의 처사를 피상적이고 근시안적인 관점에서 보면 편파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더 깊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람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편파적이 아닌 태도와 공의가 밝히 드러난다. 하느님은 온 인류에게 하느님의 은혜와 생명을 얻을 기회를 주시기 위해 참으로 훌륭하게 일들을 처리하셨다!—사 55:8-11; 로 11:33.

다윗에게 치우친 편파성을 보이지 않으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듯이, 그분은 범죄에 대한 처벌을 결코 면제해 주지 않으시는 하느님이시다. (출 34:6, 7; 골 3:25) 여호와께서는 왕국을 위한 계약을 맺으신 바 있는, 자신의 사랑하는 종 다윗과 관련된 경우에서조차 예외를 두지 않으셨다. 그분은 다윗의 죄에 대해서 그를 엄하게 처벌하셨다. 다윗이 밧-세바와 그 남편 우리아와 관련된 일로 인해 하느님께 죄를 지은 후에,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가 너를 대적하여 네 집에서 재앙을 일으키겠다. 나는 네 눈앞에서 너의 아내들을 빼앗아 너의 동료에게 주겠고, 그는 반드시 이 해의 눈 아래서 네 아내들과 동침할 것이다. 너는 은밀히 행하였지만, 나는 이 일을 온 이스라엘 앞과 해 앞에서 행할 것이다.”—삼둘 12:11, 12.

성서 기록은 다윗이 실제로 자기 가족으로 말미암아 많은 어려움을 당했음을 밝혀 준다. (삼둘 13-18장; 왕첫 1장) 하느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왕국 계약을 존중히 여기시어 그를 죽게 하시지 않았지만(삼둘 7:11-16), 다윗은 몹시 큰 슬픔을 맛보고야 말았다. 이전 시대에 살았던 하느님의 종 엘리후는 ‘방백들이라 해서 편을 들지도 않으시는 분이 계시다’고 말한 바 있다. (욥 34:19) 그러나 하느님은 앞으로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근거하여, 회개하는 다윗을 용서하시면서도 자신의 공의와 의를 보존하실 수 있었다. (로 3:25, 26) 하느님은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아와 그 밖의 사람들을 죽음에서 회복시켜 주실 공정하고 편파적이 아닌 근거를 가지고 계시므로, 궁극적으로 아무도 불공정한 해를 입지 않게 된다.—행 17:31.

재판관들에게 하신 교훈 여호와께서는 편파적이 아닌 태도와 관련하여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에게 강력한 교훈을 베푸셨다. 재판관들은 “재판에서 편파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명령 아래 있었다. (신 1:17; 16:19; 잠 18:5; 24:23) 그들은 감상적인 태도나 부유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에서, 단지 가난하다고 가난한 사람의 편을 들어 주어서는 안 되었다. 또한 부자에게도 부유하다고 호의를 나타내어, 어쩌면 호의나 뇌물을 바라고 혹은 그의 권력이나 영향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의 청을 들어주어서는 안 되었다. (레 19:15)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불충실한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자신의 율법을 어긴 데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이 특별히 지적하셨듯이, 편파성을 나타낸 데 대해서 결국 그들을 정죄하셨다. 그들이 그 땅에서 재판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말 2:8, 9.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편파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일종의 법이고 편애하는 것은 일종의 죄이다. (야 2:9) 편애하는 죄를 짓는 사람들은 “악한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이 되는 것이다. (야 2:1-4) 그런 사람들에게는 편파적인 차별을 하지 않는, 위에서 오는 지혜가 없다. (야 3:17) 회중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감독자인 디모데에게 지운 이런 심각한 의무 아래 있다. “나는 하느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함받은 천사들 앞에서 그대에게 엄숙히 명합니다. 속단하지 말고 이것들을 지키며, 아무 일도 치우쳐 행하지 마십시오.” 이 말은 특히 회중 내에서 사법 청취를 할 때에 적용될 것이다.—디첫 5:19-21.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사람들을 칭찬한다’ 편파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어기게 되면 가장 엄한 단죄를 받게 될 수 있다. 예수의 이부동생 유다는 ‘투덜거리는 사람들, 인생의 자기 처지를 불평하는 사람들, 자기의 욕망에 따라 행하고, 그 입으로 과장된 말을 하며,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사람들을 칭찬하는 사람들’에 대해 기술한다. (유 16) 이런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이고, 동물적인 자들이며, 영성이 없는 자들”이라고 불린다. (유 19) 이런 자들은 과장된 말을 하고 사람들을 칭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동요시킬 수 있는데, 이들은 바울이 ‘남의 집안에 가만히 들어가, 죄의 짐을 지고 여러 가지 욕망에 이끌리는 약한 여자들을 사로잡아 가는 사람들’로 묘사한 자들과 같다. (디둘 3:6)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멸망이다.—유 12, 13.

‘두 배나 존중받기에 합당하다’—어떻게?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그리스도인 회중의 성원들은 훌륭한 방법으로 주재하는 연로자들, “특히 말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두 배나 존중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여길 수 있는가? (디첫 5:17) 그렇게 하는 것은 이 사람들의 인간성과 능력 때문이 아니라, 맡겨진 가외의 책임들을 돌보며 나타내는 그들의 부지런함과 수고 때문이다. 하느님의 마련과 임명은 존중히 여겨져야 한다. 하느님의 회중의 일을 수행할 때 이런 사람들은 특별한 협조와 지원을 받아야 한다. (히 13:7, 17) 예수의 이부동생 야고보는 회중에서 가르치는 자들은 하느님 앞에서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으므로 더 무거운 심판을 받게 된다고 지적한다. (야 3:1)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에게 순종하고, 그들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슷한 이유에서 아내는 남편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한다. 남편은 집안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하느님으로부터 위임받았으며 그에 따라서 하느님께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엡 5:21-24, 33) 하느님의 마련에 의해 책임 있는 위치에 있게 된 남자들에게 그런 존경을 나타내는 것은 편파적인 일이 아니다.

통치자들에 대한 존경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인간 정부의 통치자들을 존경하라는 권고도 받고 있다. 그들을 존경해야 하는 것은 이 사람들의 개인적인 특성 때문도 아니고(그들 중 일부는 부패한 사람일 수 있다), 그들이 특별한 은혜를 베풀 위치에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통치자들을 존경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시기 때문이며, 또한 그 직책이 나타내는 책임 있는 위치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영혼은 위에 있는 권위에 복종하십시오. 하느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권위는 없기 때문입니다. 현존하는 권위는 하느님에 의하여 그들의 상대적 지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권위를 대적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마련을 거스르는 입장을 취하는 것입니다.” (로 13:1, 2)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권위를 남용할 경우 하느님께 답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규범에 따라, 그러한 직책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 직책에 맞는 존중 혹은 존경을 나타낸다.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주십시오. 세금을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세금을, 공세를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공세를 내고, 두려움을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두려움을, 존중을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존중을 나타내십시오.” (로 13:7) 그리스도인이 일반 시민에게 나타내는 것 이상의 존중을 이 특별한 면에서 나타내는 것은 편파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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