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우, 엄기호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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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엄기호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주경쌤 중국어 2023. 4. 19.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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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한국 방문 때 이웃님께 선물 받은 책이다. <최재천의 공부>와 함께 받았고, 원래는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를 먼저 펼쳤는데, 서문만 두어 번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책만 펼치면 졸음이 몰려오는 건, 졸릴 때 책을 집어 들어서일까?) 최근 들어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3일 만에 다 읽었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라는 질문에 예전 같으면 '나는 무조건 책'이라고 고집을 부렸을 텐데, 지금은 소소하게나마 유튜브를 시작한 후라 그런지 '유튜브와 블로그', 혹은 '영상과 글'을 대립 선상에 두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리터러시를 둘러싼 응용언어학자와 사회문화학자의 대담이 쉽지만은 않아 책 내용을 100% 소화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새로 배운 점이 아주 많았다.

책은 총 다섯 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제1장에선 누군가의 리터러시를 문제 삼는 현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요즘 아이들 문해력 문제가 심각하다는 이야기는 나도 익히 들었는데 나이 든 세대의 리터러시까지 문제 삼는 이들이 있는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한국에 살지 않다 보니 여론의 중심에서 멀어졌나 보다.

제1장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누군가의 리터러시를 문제 삼는 발언이 오히려 문제라는 것이다. 리터러시가 "상대방을 조롱하고 비판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가" 되었다.(52쪽) "텍스트를 읽고 쓰는 능력으로서의 문해력은 소리와 이미지, 공간과 제스처 등을 포괄하는 멀티리터러시의 하위 분야로서 존재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1996년도 논문(<하버드 에듀케이션 리뷰>)에 이미 나왔는데(32쪽), "한국사회는 여전히 텍스트 중심의 문해력, 성인의 문해력을 가지고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 모두의 문해력 부족을 개탄"한다.(36쪽) "글의 세계에 속한 사람에게 이 변동은 '위기'일 테지만, 변화의 과정에서 본다면 '위기'가 아니라 '변동'"이다.(23쪽)

제1장 중간에 세대에 관한 내용이 잠시 등장한다.

1960년대에 태어난 86세대부터 읽기가 대중화되었고, 그게 완전히 꽃핀 시기가 1970년대에 태어난 이들이 성장하던 때죠. 이들이 텍스트 기반 교육의 대중화에서 가장 수혜를 받았던 세대이고, 바로 문화권력을 가지고 있는 세대죠. (......)

우리 세대는 대중화된 제도교육의 수혜를 받으면서도 부모가 책을 많이 사줬잖아요. 가난한 집에서도요. (......) 그래서 굉장히 오만해요. 이 세대가.

37쪽

책을 얼마만큼 읽었느냐는 사람마다 개인차가 크고, 세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라 여겼는데 곰곰 생각하니 저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요즘 탄복하는 사람들, 책이나 강연을 통해 눈여겨보는 똑똑한 사람들 대부분이 60년대 말~70년대생이다. 40대 중반~50대가 인생의 꽃을 피울 나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세대별 차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도 사실인 듯하다. 70년대생과 몇 년 차이 안 나는 우리 세대의 경우 열린 교육 1세대라 공부를 많이 안 했고, 중학교 때 삐삐와 PC 통신, 고등학교 때 휴대폰과 각종 PC 게임이 유행하며 책을 읽지 않았다. (물론 80년대생은 80년대생 나름 톡톡 튀는 기발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멀티리터러시 상황에서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동이 발동되고 있는가를 알고 공명하는 게 중요해졌다는 것입니다. 케이팝 스타의 유튜브에 전혀 알 수 없는 태국 글자로 댓글이 달려 있고 또 한자가 적혀 있고 하지만, 거기 붙어 있는 이모티콘과 느낌표를 보면 어떤 느낌인지는 아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정동적 독해라고 하는 게 의미론적인 독해보다 훨씬 더 중요해진 것 같아요.

41쪽

'정동'이라는 개념이 새로웠다. 나 역시 느낌표를 남발하고 이모티콘 없이는 글을 안 쓰는 편이라 누군가가 이모티콘 하나 없이 '고맙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면 '진심이 아닌가?' 싶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반대로 댓글 쓰기나 짧은 메시지를 보내는 일이 긴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어렵다. 이모티콘 없이 그냥 보내긴 썰렁한데, 그렇다고 이모티콘을 남발하면 가벼워 보이거나, 형식적으로 보이진 않을까? 어떻게 해야 뻔하지 않으면서 진심을 담은 내용+정동을 전달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

자신의 삶과 유리된 글은 누구도 쉽게 읽을 수가 없거든요. (......) 텍스트라는 것이 객관적이고 공평한 난이도를 가지고 있고, 훈련을 받으면 모두가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삶과 권력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거죠. 어떤 텍스트로 평가를 하느냐는 권력의 문제예요.

47쪽

리터러시와 평가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나왔다. 우리 집 아이들은 사지선다 객관식 문제 풀이로 평가받을 일이 없는 나라에 살다 보니 예전 내가 받은 교육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이었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그런데 사지선다가 아니라고 해서 스트레스가 없는 건 아니다. 공부할 건 서술형이 더 많다.

신영복 선생께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어떤 방향을 잡아가면서도 끊임없이 나침반 바늘 끝이 떨리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죠. 떨림이 없는 나침반은 고장 난 거라고요.

56쪽

이 말이 참 좋았다. 방향을 정해놓고 냅다 달려만 가는 게 아니라 그 방향마저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점검하고 새로 탐색하는 것, 그런 게 인생 아닐까?

리터러시의 지형이 격변하는 시기인 만큼, 외부 변화에 대한 성찰도 중요하죠. 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그 변화 속에서 내가 갖고 있는 역량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신중하게 겸양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57쪽)

리터러시란 그 자체로 긴장하는 힘을 가리키는 것이겠죠.

리터러시가 어떤 상태가 아니라 운동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상태와 수준이 높다 해도 긴장하는 힘을 놓치면 소용이 없죠. 이 긴장을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성찰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8쪽)

그리하여 리터러시라는 것 역시 하나의 수준이 아니라 긴장하는 힘과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중국어를 일정 수준 이상 구사하는 사람을 '중국어 고수'라고 부른다면, 그 일정 수준이라는 건 무엇일까? 사실상 고수는 그저 끊임없이 배움을 갈구하고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라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저 또한 이런 '반향실 효과'에서 자유롭지 못해요. 중요한 건 자신이 만든 온라인 공간이 세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세계는 소셜미디어로 축소될 수 없어요. 그렇게 느끼는 건 분명 착각이죠. (71쪽)

이렇게 볼 때, 인터넷 커뮤니티 대부분의 의사소통은 동일한 언어들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것에 가까워요.

도약의 반대편에 있는 게 강화라고 생각해요. 제 책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3부에서 제가 강조했던 게, 이런 의사소통의 공간은 서로의 감정의 강도만 강화하는 공간이라는 겁니다. 공감이라는 이름으로요. 문제는 이 공간이 전혀 성찰적이지 않다는 사실이죠.

저는 이렇게 도약이 일어나지 않는 것 자체를 비문해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72쪽)

제1장 마지막에 급소를 찌르는 내용이 나왔다. 반향실 효과(echo chamber effect). 같은 정보와 아이디어가 돌고 돌며 믿음을 증폭시키거나 계속 강화되는 현상을 '반향실 효과'라고 한다. 나도 '반향실 효과'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人生只有一件事》을 읽을 때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

我还想到,自己有时与人相交,深感心领神会,颇有知音难得的感受,是不是其实只是对方认同我而已?有些人我讲话他听不懂,让我觉得他不了解我,其实也只是他不认同我而已?把认同误当了解,把不认同视为误解,因而不断错过看清自己的机会,越活越虚假,误了自己的人生。

《人生只有一件事》 5쪽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이 나에 대해 잘 모르는 거라 생각하고, 내게 공감하는 사람을 만나면 마치 인생의 지기(知己)를 만난 듯한 기분이 든다.

물론 책에서 이야기하는 반향실 효과는 정치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들이 모여서 확증편향하는 경우를 가리키지만, 나 역시 '답정너'처럼 공감의 댓글만을 원했고, 거기에서 힘을 얻었던 건 부정할 수 없다.

오늘 아침에도 메일을 하나 받았다.

"마음을 움직이는 생각

나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同意라는 마당으로 들어서게 만드는 내용

주경쌤의 블로그 감동과 감화가 저절로 일어나게 하는 마법이 있습니다.

애독자로 열심히 읽으면서

커다랗게 보는 그 열린 생각에도 관심을 둡니다."

아, 열심히 읽어주시고 또 감동하고 감화해 주시다니, 반향실 어쩌고는 둘째치고 몹시 황송하고 감사할 뿐이다.

제2장은 멀티리터러시를 키워야 하는 멀티미디어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읽기가 어떤 역량을 키워주는가라는 주제와 결합시켜본다면, 저는 읽기라는 행위가 두 가지 역량, 고독해질 수 있는 역량과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역량을 키워준다고 생각해요. (......) 다음으로 문자와 읽기가 키워주는 역량이 무엇이냐, 저는 역사에 대한 감각이라고 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건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 사유한다는 게 중요해요.

91쪽

예를 들어, 순수하게 말로만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쓸 수 있을까요? 이건 안 되는 거거든요. 말로 <토지>를 풀어내는 것, 구술로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요. (......)텍스트가 있었기에 세상을 바꾼 작품들이 우리에게 올 수 있었던 겁니다.

98쪽

읽어야 하는 이유들이 하나같이 다 멋져서 '진짜 많이 읽어야지!' 파이팅을 내뿜게 된다. "텍스트가 있었기에 세상을 바꾼 작품들이 우리에게 올 수 있었다." 세상을 바꾼 작품을 내가 쓴 것도 아닌데 이 말이 왜 이렇게 감동적이지? 세상을 바꾼 작품은 어떻게 탄생하는 걸까? 나도 하나 쓰고 싶다.

텍스트는 선형적(linear)이에요. 논문 50개를 요약해 하나의 글로 만든다고 해도 최종 산물은 선형적 텍스트죠. (......) 이런 면에서 텍스트는 해체/변형/재조립/재구조화에 매우 적합한 매체입니다.

148쪽

글이 영상보다 자유로운 이유로 유연성, 경제성, 추상성을 들었다. 텍스트는 '선형적'이기 때문에 유연하다. "해체/변형/재조립/재구조화에 매우 적합한 매체." 뭔가 어렴풋이 느낌으로만 가지고 있던 게 적확한 단어로 정리되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의미하는 대상과 언어 간의 거리가 엄청나게 먼 거예요. 거의 관계가 없는 거죠. 그런데 영상은 관계가 상당히 가깝죠. 관점이 개입되고 편집이 들어가긴 하지만, 찍는다는 것은 재료가 현실이거든요. 영상이 재현하는 미디어라면, 언어는 어떤 세계의 사태나 사건, 현상이나 대상을 상징하는 거예요.

97쪽

글의 '추상성'과 관련된 부분. 찍는다는 것은 재료가 현실이지만, 글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나는 블로그는 쓰지만, 브이로그는 찍을 수 없다. 나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없으니까. 그런데 그것보다도 현실과 글 사이의 거리감, 그 중간에 내가 개입하여 마음대로 휘저을 수 있는 지배성(?)을 나는 좋아하는 것 같다.

글을 쓰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이걸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글은 체계적이어야 합니다. 게다가 글을 쓸 때는 그 글이 당대를 넘어 후대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질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111쪽)

글을 쓰는 것은 추상성을 높여 치밀하게, 체계적으로 구축함으로써 한편에서는 보편성을 획득하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모습 또한 보여주는 일이어야 합니다. 한 권의 책이란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 세계 내의 정합성과 논리성과 인과성과 핍진성을 다 맞춰내야 하는 거죠. (112쪽)

매뉴얼화하는 것이 한국 글쓰기 교육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뉴얼은 사유를 촉진하는 것. (113쪽)

이 책에서 가장 공감되는 구절이 나왔다. "글을 쓰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정말로 어렵다. 요즘은 '쉽게 쓸 수 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쉽게 읽히는 글이 좋은 글이다'를 제창하는 시대라지만, 짧고 쉬운 글만이 좋은 글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 뒤에 나오는데(↓↓), 어렵고 복잡한 것을 어렵고 복잡하게 담아내는 글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런 글을 써야 한다.

긴 글을 읽는 게 지루하고 재미도 없지만 그럼에도 사람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를 간단하고 명료하게 파악하는 것만큼이나 사람에게 중요한 능력이,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미 충분히 복잡하며, 단순화되지도 않을뿐더러 단순화하는 게 좋은 것도 아니에요.

143쪽

단수성이 연결된다고 복수성의 세계가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복수성의 세계란 시간적이기만 해서는 안 되고 시간을 공간화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에요. 한 공간에 여러 개가 있어야 복수성이라고 인지되니까요. 어찌 보면 기록이라는 것, 읽기라는 것은 시간을 공간화해놓은 거죠. 한 공간에서 죽 읽게 되는...... 글을 쓴다는 것도 시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써놓는 순간 책이라는 공간에 들어가기 때문에 복수성이 담보될 수 있는 거예요. 복수성에 대한 역량,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복수성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복수성에 대한 감각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이 복수성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담론을 생산할 것인가를 가늠해낼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복수성에 대한 감각을 역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역량은 내 몸에 쌓이는 힘이고, 그 핵심은 유연함이에요.

113-114

위 문장은 책 전체 통틀어 가장 어려운 말이 아닐까 싶은데,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음에도 무척 마음에 들어 '☆표'해 두었다. "복수성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나에겐 있을까? 복수성에 대한 감각,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담아내는 능력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인지과학에 '체화된 시뮬레이션 가설(embodied simulation hypothesis)'이라는 게 있는데요, 쉽게 말하면, 언어는 의미를 전달해주는 게 아니고 의미작용을 격발(trigger)시킨다는 거예요. (......) 비유를 들자면, 셰익스피어가 각본을 제시하고 이에 기반해서 우리 뇌가 연기를 하는 셈이죠. (......) 문자는 큐만 주는 거죠.

126쪽

'의미를 전달해주는 게 아니고 의미작용을 trigger' 한다는 표현이 참 좋다. 정확히는 '격발시킨다'보다 'trigger'라는 단어 선택이 좋았다. 읽음과 동시에 우리 뇌 속에서 창의적 작업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읽기가 좋은 것 아닐까. 124쪽에 나오는 '변신'에 관한 내용도 좋았는데, 인용을 너무 많이 하면 안 될 것 같아 생략했다.

제2장은 텍스트를 지긋이 읽어내는 능력이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비문해는 문해력 습득에 실패한 자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영상을 잘 만들기 위해 오히려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매듭을 지었다.

제3장은 "다른 매체가 다른 신체를 구축한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흥미롭다.

다른 매체의 사용은 다른 신체를 서서히 구축해가는 거예요. 가랑비에 옷 젖듯이 뇌가, 눈이, 손가락의 움직임이 바뀌는 거죠.

142쪽

우리가 외국어로 말할 때 입술과 혀와 입근육이 그 언어에 길들여지는 과정이 있듯 매체를 접하는 동안에도 신체의 움직임이 바뀌어 간다.

제3장에도 꼭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나온다.

주목할 것은 과학과 학술 담론이 권력이라는 사실이에요. "텍스트의 시대가 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엄연한 권력을 간과하게 만듭니다. 영상의 외연이 넓어지고 역할이 다양해지고 있는 건 분명하지만, 쉽게 텍스트의 몰락을 예견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150쪽

'과학과 학술 담론이 권력'. 그리고 과학과 학술 담론에 가담하려면 읽고 쓰는 능력을 장착해야 한다.

제3장에서 흥미로웠던 개념은 '독자의 죽음과 저자의 죽음'이다.

아무래도 인터넷이라는 플랫폼 혹은 공간의 특성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공간의 읽기와 쓰기 사이에 아이러니한 비대칭성이 있다고 보는데, 쓰는 양과 길이는 무한대로 늘어나는 반면, 읽는 호흡은 점점 짧아지거나 요약적으로 되는 거죠. 인터넷에 글을 쓸 수 있게 되면서, 쓰고 싶은 욕망을 가진 사람들은 정말 시시콜콜하게, 별 쓸데없는 것까지 다 쓰고 있어요. (156쪽)

쓰는 사람은 무한대로 길게 쓰고, 읽는 사람은 가급적 결론만 요약해서 보려고 하는 이 비대칭성에 의해 독자의 죽음과 저자의 죽음이 모두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157쪽)

시시콜콜하게, 별 쓸데없는 것까지 다 쓰는 사람=나. 읽는 호흡이 짧아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못 읽는 사람=나.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게 아니라 복잡하게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깊이 있게 읽는 독자입니다. 글을 촘촘하게 읽으며 그 사람이 글을 구성해가고 논증해가는 방식, 즉 방법론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독자입니다. 이런 독자가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157쪽

그래서 내가 못하는 일(타인의 글을 촘촘하게 읽는 일)을 열심히 해 주시는 나의 독자님들께 늘 감사하다.

시간에 대한 대중의 감각이 너무 짧아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들어요. 기사 헤드라인을 보면 당장 말을 해야 될 거 같고, 내가 원하지 않는 정치적인 입장을 가진 글이 올라오면 당장 '참전'해야 될 거 같죠. (245쪽)

성인들 역시 글을 읽지 않고 댓글을 다는 거죠. (......) 리터러시 교육에서는 그런 짧은 호흡, 내가 당장 뭔가를 해야 될 것 같은 시간의 개념을 바꿔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요. (......) 소셜미디어에서는 당장 내가 뭔가 하지 않으면 내 존재감이 없어지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돼요. (246쪽)

타인의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나의 허를 찌르는 구절. 제대로 못 읽었어도 당장 '좋아요'를 누르고 당장에 댓글을 달고 당장에 '참전'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어떤 건지 잘 안다.

제4장과 제5장은 교육에 관한 이야기라 필사하고 싶은 구절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239~242쪽에 김성우 선생님이 영어 글쓰기 과제 실례로 'Life Recipe(인생 레시피)'를 들었는데 이 방법이라면 영어로도 글이 술술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어를 그냥 타인의 언어로 인식했을 때와 내 삶의 영역에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로서 인식했을 때는 굉장히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242쪽) 내가 중국어를 조금이나마 더 잘하고 즐기게 된 이유 역시 3분 스피치를 통해 중국어로 나를 표현하는 재미를 일찍부터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근본적으로, 읽기라는 건 다른 사람의 삶에 가서 닿는 일이죠. 쓰기라는 건 내 삶을, 혹은 생각과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던지는 행위예요. 그런데 이런 본질적인 것들을 외면하면 리터러시 교육이 재밌을 수가 없고 기쁨이 깃들 수 없죠.

253쪽

영화 감상이건 독서건 '반복'은 질적으로 다른 경험이 되는 거예요. 많은 경우 첫 읽기는 저자에게로 가는 길이지만 다시 읽기는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이에요.

264쪽

표현이 다 좋다. 읽기는 '다른 사람의 삶에 가서 닿는 일', 쓰기는 '내 삶을, 혹은 생각과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던지는 일'. 첫 읽기는 '저자에게로 가는 길', 다시 읽기는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

내 삶을 읽기 위해서라도 타자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하고, 타자의 삶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217쪽)

타자의 세계는 당연히 내가 모르는 세계이고,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그 앎이 깨지는 세계죠. (219쪽)

이것은 나 자신이 가진 지식의 세계를 넓히기 위한 개인적 호기심과는 다르게, 타자들의 세계에 대한 감각을 계속 계발하고 조금 불편하더라도 끈질기게 다름의 세계로 여행할 수 있는 습속을 만드는 거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리터러시가 기존 권력에 복무하게 돼버려요. (179쪽)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글을 쓸 수 없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는 타인에게, 타인의 삶에 너무 무관심하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고, 나에게 쓰고 싶은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단순히 '쓴다'는 행위만을 즐기는 인간이 아닐까. 타인에 대한 무관심은 곧 세상에 대한 무관심. 인생의 너무 많은 것이 이미 답이 나온 뻔한 것이 되어 글을 쓸 수가 없다. 이런 것도 바뀔 수 있을까? 쉬이 바뀌지 않을 거란 걸 알아 조금 우울했다.

저는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긴 호흡의 대화를 꾀하는 일은 인간의 '단기기억'에 대한 사회문화적 반역이라고 생각해요. 하루만 지나도, 포털의 검색 순위만 바뀌어도, 삶의 흐름을 놓치는 우리를 구해내려는 필사의 노력일지 모르는 거죠.

267쪽

인간의 '단기기억'에 대한 사회문화적 반역. 역사책도 단순 재미로만 읽는 나에겐 너무 거창한 말 같다. 책을 다 읽을 때쯤 받은 느낌도 그랬다. 지적이고 열정적인 두 분의 대담이 대체로 재미있었고 중간중간 끼어들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구구절절 옳은 말씀 가운데에서, 나는 그에 걸맞은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았구나!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떠하고, 우리 교육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나는 너무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후기마저도 이렇게 내 개인적으로 유용했던, 혹은 내 개인적 공감을 샀던 구절만 고르고 말았다. 아, 나 같은 사람도 글을 쓸 수 있을까? (※후기의 결말이 많이 슬픈데, 이 책을 읽은 후 바로 <인생의 한번은 차라투스트라>를 완독하여 지금은 괜찮다.)

어쨌든, 마지막 느낀점과는 별개로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는 꼭 읽어볼 만한, 배울 점이 많은 좋은 책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이렇게나 많은 책을 선물해 주신 이웃님께 감사드린다. 이웃님도 나한테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생각하며 읽으니 더 재미있었다. 그리고 소소하게나마 유튜브를 시작하였으니, 앞으로 다양한 매체를 드나들며 자유롭게 유영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대단한 걸 할 계획은 없지만, 매체의 제한을 덜 받는다는 건 좋은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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